금성면 호두산 이야기
▲제보자= 김성택(남, 1939년생)
▲줄거리= 마을 앞에 호두산이 있는데 그 호랑이가 상신기에 있는 개 바위의 개를 잡아 먹으려는데 스님이 중매봉 목탁을 치면서 잡지 못하게 해서 못 잡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순한 호랑이라고 하며 그 덕에 마을이 범죄 없는 마을로 편안히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이 앞에 우리 마을 산이, 이 앞에 있는 산이 저 호두산이라고 그래요. 호두. 범 호(虎)자 인자 거 머리 두(頭)자 그래갔고 호두산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 산이 바로 앞에 가서 이 중매봉이라는 산이 하나 있어요.
쪼깐하니. 일단 나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바로 앞에 고로고 있는데 거 그 위에 상신기라고 가면은 거기 가면 개바우라고 있어요. 개바우.
개바우가 있는데 거 호랑이가 그 개를 잡아 묵기 위해서 요렇게 갈라고 엉 허고 있는데 그 중이 이 중매봉 이것을 목탁을 치면서 그것을 허면 안된다 그래서 그 개는 결국 안 죽고 인자 살아 있는데 그 만약에 호랑이가 그 개를 물어 부렸다고 허면은 결국 좋은 것은 아니죠. 그런데 그래서 이 호랑이가 순헌 호랭이기 때문에 이 마을이 항시 온순허고 좋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우리 마을이 범죄 없는 마을로 책정을 받았는데 요 밑에 마을 죽림동, 또 이 가라실, 요 우에 상신기, 그때는 3개 마을이 봉황리입니다.
근데 2년간 해서 사업도 올렸는데 죽림동 마을에 어떤 젊은이 쪼금 실수를 해 갔고 두 번 타고 범죄 없는 마을, 지금도 요 앞에 회관 앞에 가면 부쳐 놨습니다. 그래서 요런 것도 허고 그랬는데 이제는 이 봉황리도 1구라 죽림동 허고 상신기를 2구 이렇게 해서 작년엔가 그러깽가 한 삼년 된가 그렇게 해서 이렇게 갈리다 보니까 그래도 지금도 같이 정 있게 위, 아래 마을 재밌게 삽니다.
금성면 수양재 전설
▲제보자= 김성택(남, 1939년생)
▲줄거리= 수양재에는 옛날에는 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사히 다녀오라는 뜻으로 돌을 던져서 돌무더기를 만들었는데 도로가 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수양재가 탁 뜨여야 큰 인물이 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야기= 수양재 전설은 여기서는 곡성 옥과장을 많이 소도 사러가고 많이 보고 그랬죠. 그런데 옛날에는 곡성 옥과에서도 난자을 펴갔고 씨름판도 했고 또 무정 높은쟁이라고 있어요. 고정리 거그서도 옛날에 씨름판을 허고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 담양에서 소 사러 간다네 옥과로 가면은 동정자 앞에를 지나가서 고정리 동정자를 지나서 지내가면 오례라고 있어요. 오례 삼거리 거그 가면은 윷놀고 쫌 심난헌 사람들이 우리 촌사람들 골려 묵고 술 빼서 묵고 그러고 그런 역사도 있고 그럽니다.
(조사자 : 그럼 수양재 하고는 무슨 연관이 있나요?)
수양재는 우리 담양 금성면허고 무정면 덕곡허고 경계 그 재를 수양재라고 이야기 합니다. 수양재라고 허면은 지금 인자 이쪽은 금성면이고 이쪽은 무정면 인디 여기 재에 가서 좌, 우에 가서 지금 이야기 허면 사물황당 다무라기 라고 하제. 가면은 요렇게 돌무덤이 있어 돌무덤이 옛날에 장에 다니면서 서로 던지고 다녔어.
(조사자 : 성황당 같은 거요?)
그러제. 쉽게 이야기 허면은 예, 그런 지금 형태는 없어졌어도 옛날부터서 돌무더기가 있어 돌무더기, 가면은 뭐 무사히 갔다 오라고 그런 어떤 비는 정성으로 옛날부터서 거 수양재에 가서 그것이 흔적이 남아있고, 또 그렇게 뭐냐. 인자 옛날에는 인자 그런 재가 지금 인게 도로가 돼서 확장이 되고 그래서 옛날에는 숲이 우거지고 그레 거기를 우리 어려서 갈라고면은 마음이 실큰한 그런 뭣이 있기 때문에 가면은 거기가다 무사히 통과하라고 허는 어떤 그런 것이
(조사자 : 근데 제가 오기 전에 조사해보니 이 말이 있어요. 수양재가 툭 트여야 이 비봉산의 정기를 받은 큰 인물이 난다 그런 애기도 있던데 그 얘기도 한번 좀 해 주세요.)
그런게 지금 많이 트여 있잖아요. 트여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지역이 뭐냐 우리 선조님들이 지금 현까지 살아오시면서 인자 후손들이 그래도 어쩌튼 지금 보면은 옛날보다는 후손들이 많이 밖에 나가서 많이 뭐라고 해야 되까 쫌(출세를 했다)예, 그렇게 했다고 봐야 돼야요.
지금 현재 상태가 상황이 그래요.
(조사자 : 그래서 우리 면장님 같으신 분이 바오셨을까요?)
아니 여기 제대로 면장님이 네 분이 나오셨어요. 요 마을에서요. 여그 마을을 쪼금 말씀 드릴께요. 일제 때부터서 전쟁기에 우리 집안에서 인자 언양김씬데 저로써는 할아버지 그분이 초대 면장을 하셨고, 또 그 자제분이 또 하셨어요. 그러고 외추리서도 용자 부자 그분이 또 허시고 그 다음에 인자 아까 우리 교장 나가신 그 부모죠 기자 현자 또 우리 면장을 하셨고 또 제가 해서 우리 마을에서는 면장이 네분이 나오셨습니다.
(조사자 : 거기 지금 할아버지부터 나오셨다는데 그때는 재가 확 트였어요, 안 트였어요?)
그때 허고 지금 허고 비교하면 그땐 안 트였지요. 근데 가면서 인자 트였지요. 긍게 그때 허고 지금 허고 왜 그냐면 차이가 많은 어려운 세상이고 사실 잘 사시는 분은 잘 살고 다 두루매기 입고 수염 기르고 다 갓 쓰고 다니고 했지만은 지금이야 다 평등하게 다 잘 살고 그러잖아요. 평준화 되았고 우리 대한민국도 잘 산다. 그렇게 생각 하시면 되죠.
배정자나무
▲제보자= 김성택(남, 1939년생)
▲줄거리= 봉황에서 무정으로 넘어가는 서암산 바위에 배를 맺던 고리가 있는데 거기서 배를 매고 쉬었다고 해서 배정자인데, 그곳에 느티나무가 있어서 배 정자나무라고 했단 이야기다.
▲이야기= 배정자 그 배정자라는 애기는 거 수양재라고 거그서 보면 우리 봉황에서 무정 덕곡 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가는 서암산이 있습니다. 그 서암산은 서자는 상서 서(瑞)자 바위 암(巖)자 요렇게 해서 상서서자 그렇게 돼았는데 거 바우에가 배를 맺던 고다리가 있어요. 배를 맺던 흔적이
근데 역사상으로 봐서 옛날에 그러면은 여그도 그때는 바다였지 않냐 이렇게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고다리가 있고 그래서 거기서 배 정자, 배를 매서 쉬었던 곳. 배 정지, 이를테면 저 정류소, 야튼 말로 배 정자, 그런 식으로 예, 배에다 이렇게 정자라고 해도 배 정자나무
그런데 거그 가면 이렇게 느티나무가 있어요. 고목나무가 긍게 배정자라고 해. 원래 심었던 것은 죽고 없어지고, 그 뒤에 새로 심은 것이 지금 상당히 커가지고 지금 한 15년 정도 되까, 15년 더 넘죠. 솔찬히 한 29년 정도 될까. 아니 새로 심었거든. 그래갔고 도로를 내면서 새로 심었어.
점 치는 시절나무
▲제보자= 김성택(남, 1939년생0
▲줄거리= 이팝나무가 한 그루 마을 앞에 서 있는데 그걸 마을 사람들은 혼자 서 있는 나무라 해서 홀애비 정지나무라 했으며, 그 이팝나무가 잎을 피우는 모양을 보고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 알아 볼 수 있어서 시절나무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이팝나무 때문에 전설이 있어요. 그 전설은 인제 그게 원래요 마을에서 명명허기는 홀애비 정자나무라고 그랬어요. 근디 그 나무가 봄에 잎이 활발하게 잘 피면은 그 해에 풍년이 들고 또 잎이 부분적으로 핀다든지 예를 들어서 그것을 미리 예측을 허는 그런 나무다. 시절나무라고 했었는디 지금 중간에 2000년 땐가 지금 태풍으로 dsl해서 그것이 고사를 해서 그걸 인제 쪼금 도로 확장 허면서 쪼금 이동을 했어요. 다른 데로 옮겨 심었는디 그것이 회복을 못 허고 그리서 그대로 그 품종을 지금 옆에다가 다시 식재를 했어요. 그래서 그것이 이 마을 생긴 이후부터서 계속해서 시절나무가 유지가 돼서 마을 수호신으로 그렇게 마을에서는 알고 그랬거든요. 근디
(조사자 : 그래서 그게 아들 정자나무 인가요?)
그러제 말하자면 저기 지금 현재 심어진거 아들 정자나무가 아니고 거 지금 그때는 홀애비 정지나무란 얘기가 그 나무는 같이 산 적이 없어요.
딱 혼자 그러게 서 있는 나무죠. 우리 농촌에서는 홀애비 정지나무라고 그렇게 애기를 했는데 지금은 표준어로 이거 이팝나뭅니다. 이팝나무
근데 아까 거 우리 이장님께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파리가 잘 피고 꽃이 하얗게 그렇게 잘 피면 금년 농사는 풍년이고 만약에 그 꽃이 제대로 안 피면 흉년이 든다. 그렇게 어른들이 지목을 했습니다. 근데 그 나무를 심어놓고 거 꽃이 활짝 필 때는 군청에서도 와 가지고 사진을 계속 찍어가고 그렇게 했어요.
그러다가 사실은 산쪽에서 물이 내 논 것이 너무 거 우리가 관리를 좀 잘못 했는가 모른데 그 나무가 결국 죽었어요. 인자 죽어서 그걸 또 다시 크레인까지 갔다가 파서 그 옆으로 옮겼는데 결국은 지금 밑에 좀 가지가 아니라 거의 다 죽었어요.
그래서 거 옆에서 우리 마을에 사는 김종승이란 사람이 이팝나무를 하나 대행으로 주어 가지고 심은 것이 지금 솔찮히 지금 한 10m 그 정도 될 정도로 솔찮이 큰거 심어서 지금 크고 있습니다.
(조사자 : 옛날에 이팝나무를 쌀밥나무라고 한 이유가 있었군요)
예, 쌀밥나무라고 했어요. 그대는 귀했죠 그 품종이 관방천에도 딱 한주밖에 없을 거에요 이팝나무는 꽃이 하얗게 꼭 밥을 담아 논 모양이래서 쌀밥나무라고 했어요. 이팝나무가 꽃이 하얗게 피잖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