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3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3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11.26 15: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평 포의사

 

신학문의 요람 상월정 

▲제보자= 고영준(남, 1939년생)
▲줄거리= 상월정은 고려 때는 대자암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상월정으로 불렸는데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곳이며 신학문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 고려 때는 대자암이였어. 암자여. 대자암이었는데, 불교스님들은 학승이라고 있제? 공부만 하는 양반들을 학승이라고 한다대.
구례화엄사 스님 세분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나한테 왔어. 그분들이 하는 말이 역사에보믄 고려때 큰스님 보조국사라고 배웠죠? 그 스님이 도를 깨달은 것이 창평 대자암에서 깨달았다는 기록이 있대요. 그때도 공부만 하는 스님보고 학승이라고 하더라고. 그럼서 고려 때 창평 대자암에서 보조국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그 터가 어디냐고 왔어.
그래 내가 안내를 했어. 거기다고
그러다가 저것이 인자 조선이 되면서 억불숭유여. 불교는 억압하고 그것이 상월정으로 바꿔져. 세조 때 언양김씨 김자수 그분이 바꿔. 상월정으로. 그렇게 쭉 오다가 임란 이후로 우리한테 넘어와. 그러다가 저것이 도저히 그 집을 보수도 못해 인제 오래돼가지고 보수도 못하고 방법이 없어 그래도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어. 지금으로부터 한 50년 전에 그래서 저것이 전남도 지정문화재여.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 마지막 때, 문화재청서 와갖고 국가지정문화재로 만들라고 자기가 데꼬 온 고 사람들보고 빨리 도에 얘기해갖고 올리라고 하다가 그만 둬버렸어. 그분이 문화재청 워크숍을 여기 상월정에서 하자 그랬어. 그러니까 여기가 역사적으로 근(대) 신학문 요람이여 여기가. 1906년도에 거기서 영어선생, 일본말 갈키는 사주 선생, 데꼬와서 영어를 갈켰어.(그런내용을)다 알아. 알면서도 담의 창평이다 해가지고 관광안내판에도 없어
(조사자 : 상월정이 담양 10정자로 들어가 있어요)
식영정, 송강정은 다 있고 거기가(상월정 찾아가기가) 너무 힘들어.
(조사자 ; 공부하는 분위기는 딱 되어 있더라고요?)
근데 여러분들은 몰라 도올 김용옥이는 다 알잖아. 도올이 안다고. 이런 곳이 없다는 거야. 조용환이 교수도 나보고 9월 달에 올란다고, 하루저녁 잘랍니다. 하더라고 자거라, 내가 그랬어.
(조사자 : 터가 좋아요? 분위기가 좋아요?)
터도 좋고, 또 하는 뭐인고니 조선 500년사에 어떤 씨족들도 후손들 공부 갈킨 정자는 다 있어. 그란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우리뿐이 없어.
두 번째, 들어오면은 깊은 산속을 들어 온거 같다 그거여. 아조, 그다음에 거기 가면 조용해서 새소리밖에 안 들리지. 아무것도 안 들려. 참 묘한곳이다. 근다고 세상에 김용욕이는 다 알아. 이런 곳이 없다고
근데 올해도 얘기하구만, 담양에서 떨어져 있어. 추월산, 금성산성, 금성산성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데요. 삼인산도 굉장히 중요한 곳이여.
대전면에까지 안내판이 다 있어. 근디 상월정만 안내판이 없어. 상월정 꼭대기가지 올라 갈라믄 상당히 힘들어.

창평 포의사 이야기
▲제보자 = 고영준(남, 1939년생)
▲줄거리 = 포의사는 고광순의병장을 모시는 사당이며, 유물관과 동재 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경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필 포의사를 받아와 편액을 걸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직 기념관으로 역할이 되고 있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야기 = (조사자 : 사당은 언제 건립되었고, 왜 포의사인지 이야기 좀 해주세요)
포의사 얘기를 할게. 60년대 후반기 때일 거여. 서울서 젊었을 때 월급쟁이 하고 있을 때여. 그때 내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민원을 냈어.
(조사자 : 뭐라고요?)
사당을 하나 할랍니다. 내가 서른 살이나 되었을 때 박정희를 만난 거여. 그 때 이후락이가 비서실장이여. 내가 통이 무지하게 큰 놈이여. 근데 이후락이 만났을 때, 아무렇지 않은디, 박정희 만나러 들어가면서 떨려불어라. 그것 묘하더라고. 정말 묘해. 그래가지고 박정희가 그때 돈 200만원 내려 줬어. 담양군에다가가 지으라고. 그 다음에 이름을 하나 부탁해갖고 올렸어. 세 가진가 이름을 지어서 올렸어.
(조사자 : 선생님이 직접 지어 가지고 올리셨나요?)
어른들한테 물어갖고 지었제. 광주가면 포충사가 있잖아. 그란 게 그래서 포의사라고 이름을 지었어. 몇 가지 두 가지 세 가진가 올렸어. 그런 게 썼다고 가질러 올라오라고 하더라고, 내가 서서 받았어.
(조사자 : 글자를 받아 왔어요?)
응 그래서 박정희가 여러 개를 써놨더라고, 대통령이 . 그런 디 포의사를 들더니 이것이 제일 좋다 헌디, (박정희가) 나보고 석 장인가 준 놈으로 고르라 헌디, 내가 글씨를 볼 줄도 모르고 ‘각하가 주신 게 좋습니다.’그러고 세장을 가져갈란 게, 안된다고 허고, 한 장만 내가 쥔 놈을 주더라고. 이후락이가 안 된다고 그래. 그래서 그거 갖고 왔어 내가.
(조사자 : 그래서 한 장만…?)
(조사자 :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어요?)
응. 그것이 박정희 글씨여. 그래서 그때 비서관 이야기가, 개인 사당이 아니라 기념관은 처음이다고 그려.
(조사자 : 글씨는 그때 갖고 왔고 건물은 언제?)
짓다가 그때 불난 집이여. 그 집이
(조사자 : 그러면 포의사 있는 자리가 불난 집 자리에요?)
불난 집, 거가 집을 지었어. 세월이 100년 흐르면서 땅의 주인이 바꿔져 불었어. 땅이 그러니까 남의 땅이 있게 되야, 남의 땅에 그 집 상당히 복잡해. 그래서 요리 옮긴 거여. 이쪽으로 내가 옮긴 거여. 그 자리서.
(조사자 : 지금 있는 자리는 그 자리는 아니에요?)
불난 집 자리여. 그런 뜻으로 내가 했어. 그때는 그 소유주가 승낙을 해갖고 다 했었어. 근데 그 양반이 돌아 가셨어. 근게 주인이 바꿔지니까 나중에 말 들어 본게 그래 가지고, 세월이 100년 이상 흘러 불었는데, 그래서 거기다 다시 할라고 그러다가 12·6이 났단 말이요. 막 하고 있는데 12·6이 나니까는 전두환 정권 아래서 내가 보안대에 2번 불려갔어 보안대에.
어떻게 해서 박정희한테 그걸 받았냐고, 두 번 갔다. 근게 별것가지 다 조사한 사람들이여 델고 가서.
(조사자 : 포의사에서 녹천 고광순 선생님 한 분만 모시는 거예요?)
근디 이것이 아직은 안 모시고, 신위를 안 모시는데, 혼자 모시는 것을 독설이라고 해. 또 여러 명이면 병설이라고 해.
혼자 있으면, 독설은 외롭다는 거야. 근게 병설이 좋다. 이런 얘기가 있어. 근디 혼자 있는 곳이 좀 드물어요. 우리 포충사 제봉님도 거기 다섯 분이 계셔
(조사자 : 사당에서 고광순 의병장님 제사는 언제 지내요?)
제삿날이 음력으로 구월 열 하래. 그 당시 양력으로 10월 16일이더라고. 그 당시에
(조사자 : 그러면 거기 사당에 가셔서 다른 분들이랑 같이 모시는 거예요?)
아직은 사당에 인자 위패를 안 모시고 있으니까, 여기 집에서.
(조사자 : 집 제사만 지내고, 사당에서는요?)
아직 안하고 그 대신 내가 현충일 날 연곡사에 가서, 뒤에 가서 거기서 구례 군민들이 세운 그 비를, 순절비를 48년돈가 이산 할 때 심은 거여. 대전 가서 그러고 제삿날은 밤에 제사 모시니까 낮에 산소에 가서 내가 보고.
(조사자 : 포의사는 어떤 건물이 있고, 안에 뭐가 전시 되어 있는지요?)
안에 유물관에가 몇 점 있어. 불 나부러서 유물이 없어. 짜집기 해 놓은 거여. 그래서 담양군 어른들이 다 모셔진다 허면, 후손들이 동의를 해 줘야지. 안하면 못 모시니까. 그래서 군에서 해야제. 내가 한다 할 수 없고, 글면 그 분들 유물 있을란지 몰라.
(조사자 : 그럼 현재는 유물관하고, 사당 제사 지내는 사당하고)
신위 모시는 것 하고, 그 다음에 대부분 관리실, 그 다음에 옛날에는 집이 이렇게 있잖아 글면 신위 여기 모셔져, 신위가. 그 다음에 이렇게 되어 있어. 여가 대문 있고 여가 또 신위 있는 칸이 막아져 있고, 여가 또 대문이 있어.
대문이 여가 마당이고 이것이 그랬는데, 동재, 서재라고 양쪽 방이 있어.
요새 지은 집은 왼쪽은 유물관, 오른쪽에는 전부 강당으로 써 강당으로. 근디 나는 여기다 강당을 안 짓고, 소위 무명탑을 할라 했어. 와라 했다가 같이 갈 거여. 그것이 못하고 있어.
(조사자 : 옛날 보통 동재 서재라 하는데, 지금은 유물관이나 강당으로 하고 있다고요?)
강당을 하드라고.

고광순 의병장 순절기
▲제보자= 고영준(남, 1939년생)
▲줄거리= 녹천 고광순은 송사 기우만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고종의 명으로 의병이 해산 되었지만 국권이 흔들리자 하동 거창 등 영호남을 거점으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불원복태극기를 만들어 간직했으며, 연곡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왜군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한다.
▲이야기= 이 양반이 광자, 순자. 이 양반 호가 녹천이여. 이 양반 3거괴 중에 한 분이여. 조선에 큰 도둑놈 세 사람이 있어.
첫째 면암 최익현, 그다음에 춘천에 가면 의암호 있지, 의암호. 호가 의암이여. 유인석 어른의 호여, 그도 의병장이여. 다음에 녹천 고광순. 3거 큰 도둑놈이여.
장성에 송사 기우만 선생이라고 있어. 또 그 분이 벼슬도 했고, 그분 할아버지가 노사 기정진. 우리나라 제일 큰 학자여, 노사 기정진 선생리라고 그 손자여. 벼슬 했으니까는 그 분은 나이도 많고, 근게 어른으로 추대해 갖고 대장으로 했어.
그랬는데 그 때 고종이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려. 그때 임금이 하는 것은 그 나라 그대로 법이여. 그때는 임금이 나라여. 임금이 근게, 전부 옛날에 글 보면 임금한테 충성 혀. 임금 국가고 조선이 거의 임금이여. 근게 임금이 해산하란 게 알았어. 임금 말 인디, 해산 해부렀어. 그때 조선팔도에 군대도 거의 해산해.
근게 의병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총이 있어? 아무것도 없어. 의기(義氣)로만 모인 것이여. 의기로만. 그런디 딴사람은 다 해산을 했는디, 유일하게 녹천은 10년 동안 저희가 당한 것, 국권을 뺏긴 것에 한을 품고는 안동, 하동 거창을 돌아다니면서 요새 말하면 영호남을 돌아 댕기면서, 규합하고 다니셨어. 안동, 하동, 거창에 녹천이 왔다 간 기록이 이쪽보다 기록이 더 많아 불어.
글다가 인자 1907년에 그 때 을사보호조약인가 뭔가, 을사조약인가 되야
그러니까 그때 다시 일어나가지고, 어른으로 추대를 해줘. 그것은 여그 대덕면 가면 저심(운산리)이라고 있어. 저심리, 그 동네에서 이씨 제작이 어마어마하게 컸대요. 거기도 6·25때 불이 나불어다더만.
거기서 의병발대식을 해. 그래가지고 녹천이 그때는 게릴라전이제. 그래가지고 많은 곳에서 그때 일본 놈 하나 죽이기 위해 의병은 100명 정도는 붙어야 그럴 거여.
첫째 무기가 틀리고 무기가 그러고, 무기란 것은 포수들 지리산 포수, 백두산 포수, 홍범도가 그 당시 유명한 백두산포수여. 거가 백두산 포수 출신이여. 그 사람이 독립운동을 했지. 만주에서 근게 포수들이.
그래가지고 녹천이 학계에서, 대단한 어른으로 평가 헌 것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국가의 일념으로 돌아 다니셨는데, 연곡사 들어간 동기가 있어.
첫째 연곡사는 뜰이 있어. 거기서 장기 항쟁을 할 수 있어. 그래서 훈련을 시켜 인자, 의병들이 오합지졸 허고 훈련도 안된게. 훈련을 시킬라고 그리 들어가신 거여. 그래서 학계에서는 녹천을 상당히 전략가로 평가를 해요 전략가로.
일본 놈 토벌에 녹천 부자가 상당히 강했다는 것은 뭣인고는 진해가 증포, 대표, 부대가 있어. 근게 그만큼 세가 세었다는 얘기여. 일본 놈 기록에도 나와. 기록에는 13분으로 나와. 또 어떤 기록에는 3~40명으로 나와. 근게 모르겠어. 지금 우리는 일본 놈 경찰기록, 일본 전쟁기록으로는 13분으로 나오거든.
(조사자 : 축소 시켰을까요?)
근데 그것은 아까 제자 일부는 명단이 나온 디, 어떤 분이 우리는 13분으로 생각하고, 나머지 열한 분이 누가 죽은 지 몰라. 열한 분은 그래서 내가 매년 현충일 날이면, 연곡사 춘제 빌러 가. 가서 열세 분을 내가 잔을 놔, 모르니까. 근디 두 분 밖에 몰라, 어떤 분이 돌아가신지 몰라
(조사자 : 거기서 살아남으신 분은요?)
그런 얘기를 난 잘 몰른디, 동네 사랑방에서 나온 얘기여. 그 분이 나와서 아침에 대변보러 갔던 모양이여. 새벽에 산속이니까 일본서(군) 와. 근게 도망쳐버렸던 거여. 말들이 모두 그런거여. 그때 본부에다 얘기해갖고 녹천이 너만(이라도)도망쳐 불어라 동네서(하는 말이)그랬다는 거여. 그랴꼬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생생한 증언을 해줬제. 그 분은 뭐인고니 녹천 집필묵, 그때는 글씨 쓰고 헐라면은 그걸 짊어지고 다닌 사람이여. 짊어지고 다녔어.
그 양반 돌아가실 때가 60이여 그런게 300년 전에, 우리 제봉할아버지도 60에 전사해서 돌아가셨어. 그란 게 학자들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일본 놈 손에, 60에 똑같이 돌아가셨다. 그렇게 딴 사람들이 무지 얘기를 해.
(조사자 : 그때 돌아가셨던 분들을 누가 수습을 하셨나요?)
기록에는 임춘홍이란 어른이 동네 어른이여. 일본 놈들이 불을 질러 부렀어. 근게 녹천 시신을 서까래로 이렇게 덮어 놨어. 3일후에 구례에 계신 매천 황현선생이 와서 초분을 해줘. 초분을 이렇게 해줘. 황매천이 시를 지어. 황매천하고 녹천하고는 인연이 있어
기록에는 봉분을 초분 뒤 흙까지 덮어 놓았다고 나와. 그러다 매천이 3년 후 자결해. 한일합방 되니까. 근디 매천이 자결할 때, 시가 네 편이 있어. 절명시 네 편이라고 그래. 그 중에 한편이 연곡사 녹천한테 쓴 시하고 똑같애.
‘글만 아는 놈은 아무 쓸 데가 없다.’
그래서 사학자로 유명한 조동걸 교수가 있어요. 그 양반이 하는말이 매천이 자결한 것은, 큰 뭔 원인은 녹천한테 있다, 녹천한테 죄를 지었다는 말이지. 시가 절명시 4편 중에 한편이 내용이 똑같다는 거여. 그렇게 사학자들은 얘기한 사람도 있어요. 매천이 자결하거든.
(조사자 : 고광순 선생님 얘기하면 태극기)
1895년도에 대한제국이 되야, 그때부터 고종이 황제가 되야. 황제. 폐하는 고종이 처음이여. 폐하는 황제한테만 하는 칭호여.
그 당시에 태극기란 것이 국가에 국기가 제정 되었다. 그려 1895년에 시골에서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 말이여. 그 양반이 그러고 그것을 군기로 써 군기로 해가지고 태극기에 ‘불원복’이라고 써. 내용이 멀지 않아 나라가 회복 된다, 그랬어.
(조사자 : 고광순의병장의 가족사를 듣고 싶습니다.)
일본 놈들이 집에 불을 질러라고 들어가야 되는디, 그 아드님이 집에 못 들어오게 하니까, 해필 이놈 새끼들이 생식기를 찔러 불었어. 대검으로. 그래서 생식불능이 되야 분거여.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어. 아드님이 한분 계신디, 후유증으로~ 우리 집이 손이 끊어지니까 동생이 양자로 왔어.
우리할아버지가 된 거여, 재자 준.
녹천도 양자로 왔어. 녹천도 양자로 왔는데, 종가집이니까 녹천 아들도 양자여.
(조사자 : 고광순 선생님이 현충원에 모셨어요?)
마나님하고 같이 부부간이니까 현충원에 계시고, 사당은 여가 있고, 내가 모시고 위패는 여기(종가에)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9번지
  • 대표전화 : 061-381-1580
  • 기사제보 : 061-382-4321
  • 인쇄물,기념품,광고문의 : 061-381-3883
  • 팩스 : 061-383-211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근
  • 법인명 : 담양군민신문
  • 제호 : 담양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232호
  • 등록일 : 2006-9-14
  • 발행일 : 2006-9-14
  • 발행인/편집인 : 최광원
  • 담양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담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dy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