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 삼천리 마을의 유래
▲제보자= 김우용(남, 1941년생)
▲줄거리= 남극루(양로정)에서 월봉산과 운암리 용운동 세 개의 물이 합쳐지는 합수목이며, 삼천리, 삼지천, 삼지내 같은 마을을 부르는 명칭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조사자 ; 마을 이름을 삼지천이라고도 하는데요. 요 삼지천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세요)
삼지천이라는 것은 대덕 운암리 거거서 내려온 운암천 물허고, 월봉산에서 용수리 쪽으로 내려온 물하고, 용운동에서 내려온 물이 합해진 곳이 저기 슬로시티 양로정(남극루)이라고 했는디, 그걸 우리 여기 산 사람들이 실지 농사를 지면서 그걸 실질적으로 하면은 지금 운암천에서 내려 와갖고, 요 밑으로 흐른 것이거든요. 대덕 운암리에서 내려온 물 요것이, 지금 요 앞으로 흘러서 또 양로정이라고 알죠. 그렇게 해서 거기서 나온 물, 여기서 나온 물, 여기서 내러간 물, 이것이 남극루 거가 딱 합수목이에요. 그래서 삼지천이거든요.
근디 실제 어느 책에 보면은 실질적으로, 우리 창평면 삼지천은 거가 합수머리다 거가 합이천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산 사람으로서 지형지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삼지천이라고, 세 천이 딱 흘러서 맞아졌기 때문에 여기 남극루 거가 합수목이고, 거기가 우리 창평에 지역적인 여건으로 봐서, 그때 거기서부터 그래서 남대문이라고 해 놓은 거 있잖아요.
그걸 내가 현관문이라고 해가지고 그걸 현관문이라 했어. 왜냐면 고리서 지금 면사무소를 바로 들어가는 현문이에요. 현문 이것으로 봐서는 삼지천이 양로정이다, 남극루다 그래서 이 마을이 삼지천 마을다.
창평 월동마을 유래
▲제보자= 강차남(남, 1943년생)
▲줄거리= 중국 정릉의 창평을 따라 이곳도 창평이라 하였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인재가 많이 나왔으며, 월동마을이 창평에서는 제일 먼저 인가가 조성되어 나왔다고 짐작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우선적으로 창평 하면은 전국적으로 인재가 가장 많이 탄생한 지역이에요. 군단위로는 광양이 인재가 제일 많이 태어났고, 군(면)단위로는 전국적으로 창평, 사무관외 서기관급이 백 명 이상이 된다고 하니까 한 십년전부터 그 대단한 거 아니요.
우선 중국 정긍을 가면 창평이라는 데가 있어요. 거기서 공자님이 태어나산 곳(노나라 창평향 추읍)이고, 중국의 큰 인물들을 일일이 내가 나열은 안합니다마는, 전체적으로 중국 창평현에서 태어났다, 그러믄. 중국의 창평하고 여기 담양 창평에 동출서유로 숙원론이나 반룡산, 월봉산이 아니라 반룡산, 니구산, 그 물행이 똑같아요. 그 쪽으로 인자 거기는 크고 여그는 적지마는 그 형태가 중국 정릉에 있는 창평하고 똑같다 해서 여그를 창평으로 따라서 호칭을 한 거예요. 지금 현재 근게 반룡산, 니구산이 꼭 들어가제. 월봉산, 니구산.
(조사자) 월봉산을 반룡산이라고 해요?)
반룡, 전에는 반룡산. 설반자, 반룡산. 여그는 니구산. 그렇게 해서 연결이 대아요. 창평서 이 월동마을 달동네가 창평터 생기기 전에 여기서 먼저 인가가 정착이 돼서 나온 것이여. 창평현이 여기서~
이쪽이 동쪽이니까 마을에 달, 해가 제일먼저 떠오르잖소. 여거가 동쪽에서 떠오르제, 달도 동쪽에서 떠로르고 해도 떠오르고 그래서 먼저 뜬다고 해서 달동네라고 했겄제. 달 월(月)자를 붙여서 마을 동(洞)인께 월동이다 그렇게 되아있제.
이 안에 가면은 자연석 바위가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말하자믄, 마을 현이 그 골착물을 갔다 먹었어요. 수질조사를 했는디 물이 제일 좋았던 가비여. 근디 그 자연석 바위에다가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 정도 되겄소. 현령익상, 날개익자, 항상상자. 익상은 자기 이름이겄제. 현령 익상영세불망비. 영세, 영원히 불망비니까 잊지 못 헌다해서 영세불망비라고 그 자연석에다 그 글씨를 써 놨어요. 지금도 가면 그대로 있어. 저 고읍리에 가면 똑같은 비가 있도만, 그쪽하고 이쪽하고 연결이 되아 있겄제. 고읍리도 역사가 깊으니까
창평 맹호 축구단 이야기
▲제보자= 김우용(남, 1941년생)
▲줄거리= 창평맹호축구단이 일제 강점기 때 짚신을 신고, 저고리 적삼 바지를 입고 평양까지 걸어서 가서 1등을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이야기= 원래 우리 창평이 축구만 잘 헌 것이 아니고 씨름도 잘했어요. 씨름도 잘했는데 씨름(대회가)이 여기에서는 나주목사고을, 광주목(사) 또 다음에는 남원목(사가)있었어요.
우리 창평이 (한 때는)나주에 소속 되었다가, 또 남원으로까지 소속이 되었어요. 글믄 인자 전국에서 씨름대회를 남원에서 가장 큰 대회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창평 사람들이 결승에 올라가지 못 허면서도 소 있잖아요. 큰 소를 끌고 와부러.
창평 사람들이 축구뿐이 아니라 모든 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 그래서 창평 사람들이 맹호축구단을 조직 허는디, 누구하나가 도와주지 않고 (그러니까)자기들끼리 사람을 규합을 해서, 축구단을 조직합니다. 그
러고 나도 그 사이에서 견뎌 봤지만, 누구하나가 돈을 크게 내놓은 것이 아니고. 전부 십시일반 각출을 해가지고 그 축구단(대회를)출전합니다.
서울에 가면은 창평 사람들이 짚신을 신고 공을 찹니다. 서울에 가서 보통 1, 2등을 해오는데 맹호축구단이 어디까지 갔느냐. 그때 당시 뭐 운동수단도 없고 그런디 평양까지 가. 짚신을 신고 평양 가서 우승을 해요. 우승을 해오니까 이 작은 고을에서 광주만 가서 일등을 해와도, 아조 지역적인 커다란 환영을 받고, 축구단 명성이 높아지는데, 평양 가서 1등을 해왔으니 얼마나 유명했겠습니까.
(조사자 : 그때가 언제였대요?)
그때 일정 때,(1929년 정도에서 달리기를 해가지고 거기서 우승 하고 돌아오신 분 중에 박석기, 박석우, 고광표씨 이 분들이 우리 맹호축구단에 뭔가 흔적을 남기자 그래가지고 지금 게이트볼장이 (당시에) 창평공설운동장이라 해가지고 그 분들 사비로 땅을 샀어요. 땅을 사가지고 축구장을 만들어 가지고 남사개면(대덕, 창평, 고서, 남면) 대회를 하고, 담양군 대회도 가고
(조사자 : 의상은요. 어떤 옷을 입고 가셨어요?)
옛날에 나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팬티에다 창평이라고 써 붙이고 갔겄느냐. 짚신을 신었으니까 바지에다 쨈매는 저고리 적삼 그걸 입고 가서(했다고 하니)그래서 내가 장하다. 저고리 적삼 바지를 입고 가갖고 더군다나 짚신으로 축구단을 운영을 했으니까, 그래서 제가 그 덕을 봤습니다.
창평주민 항일정신
▲제보자= 김우용(남, 1941년생)
▲줄거리= 창평의 항일정신은 일본주재소는 낮에 근무하지만, 밤에는 무서워서 근무를 못하게 할 정도였고, 동학농민운동에 앞장섰으며, 4·19학생운동이 시초였다. 생필품을 창평 면민들이 나오는 시장으로 가서만 구입했고, 외지인들이 창평이 독하다 하는 것은 일본상인들에게 항거하기 위해 독하다고 한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창평에 일본주재소가 있었습니다. 주재소라고 지금 현재 파출소. 주재소가 있으면서 창평 면민들에게 혹독하게 했어요. 지금 농협자리가 일본 놈 상회였어. 그때부터 그 정신을 이야기해요.
우리 면민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디, 왜 생필품을 안 갖다 놓느냐,(항의를 해 놓고) 가득 채워 놓으면. 한명도 가서 사는 법이 없이 창평 면민들이 하는 시장 통에 가서 물건을 사가고 가. 항일정신이 나온 거예요.
창평 주재소가 굉장히 큰 주재소인디, 군 단위 주재소입니다. 근디 낮에는 와서 근무를 해. 그 사람들은 말 타고, 칼 차고, 총 들고 그러고 했어요, 창평에서 낮에는 근무를 허되, 밤에는 광주 가서 자고 밤에는 못했어요. 밤에 여거서 근무를 허믄, 면민들이 가서 재떨이 엎어 불고, 죽여 불고 허니까.
그 얘기를 허자면 동학농민운동을 때도 시장에 가면 비석이 조그만한 이 형식적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때도 여기서 우리 면민들이 솔선해갖고 나와서 운동을 했고, 광주학생사건. 거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돼.
그 전에 큰 기와집 있죠. 고광신씨라는 분이 면장을 했어요. 면장을 했는디 그 분이 광주일고, 서중 다닐 땐게 그때 나주 학다리 학생들이(일본놈들 하고 )싸울 때, 그 때 그 분들이 참여를 했어요. 근게 항일을 위한 모든 행사에는 우리 창평 면민들이 다 참여를 하게 돼요. 어른, 애들 막론하고 다 참여를 해요.
그래서 인자 항일정신 그러는데, 그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런 사건들에 연류 돼가지고 여거서 학교를 못 다니고, 외지로 간 사람들이 또 거기에서 운동을 했어요. 학교로 가면 학교에서 독립운동하고, 일본제국대학, 중앙대학, 명치대학, 거기에 있는 우리 창평 사람들은 전부 독립운동을 다 했어요. 그래서 옥살이도 하고 그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런 정신이 있는 반면에 우리 창평에서는 문화적으로 그걸 기리는 동상을 만든다던가, 비석을 좋게 하나 만든다던가, 그런 것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광주에서 그럽디다.
“창평놈들은 고춧가루 서 말 먹고, 물동우 지고 삼 십리를 간다.”
그런 말 헌디, 외지인들이 창평이 독하다 하는 것은 일본상인들에게 항거하기 위해 독하다 한것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