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9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9
  • 자료제공= 담양문화원
  • 승인 2020.09.2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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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를 이고 살았소
▲제보자=최종현(남, 66세)
▲줄거리=박정희 정권시절 광주댐 물을 고서, 망월동, 용전으로 내려 보내기 위해 수로공사를 했는데 고서면 외보마을은 마을 정면에서 가로지르는 공중수로였다. 사람이 안사는 곳은 지하수로,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상공사로 강행했다. 엄청난 반대와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이야기=1968~9년도에 박정희 대통령 때 마을 앞을 정면으로 가로지르는 수로공사를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마을주민 30호가 살고 있었는디, 마을 정중앙으로 다리발을 세워 공중으로 물을 퍼 나르는 수로를 만든다는 것이요.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제. 요, 물이 광주댐에서 흘러나온 물로 고서, 광주 망월동, 용전 들판까지 농사를 짓는 물이여, 근디, 사람 안사는 동네는 땅속으로 공사를 허고, 우리 마을은 사람들이 사는디, 공중으로 공사를 하것다는 것이요. 마을을 사람으로 치면 이마팍에다 기브스를 해갖고 마을 안팎에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것이여. 그때 동네 사람들이 완존히 미쳐버렸제. 그때 완존히 동네를 베레버렸제.
(조사자 : 그때 공사할 때 마을사람들이 반대를 안 하셨나요?)
그때가 무신 세상이요. 군인들이 달라고 허면 주고 반대 허믄은 큰일 났제. 그래도 우리 마을사람들은 밤낮으로 반대했제. 아무리 해도 안 됩디다. 그때만 해도 군사정권 시절 아니요. 박정희 때는 땅도 빼앗아가도 아무 말도 못 헌 세상 아니요. 아무리 반대해도 공사를 강행합디다. 그때 공사반대 하다가 사람이 죽을 뻔 했제. 이재선씨라고 그때 당시 새마을 지도자였는디, 이 사람이 다리발 세우려고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고 있는디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어. 동네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했제. 포크레인 바퀴 속으로 들어갔는디, 용케 살았단 말이요. 이재선씨는 공사인부들에게 끌려나오다시피 해서 어디로 데려가 불고, 그 뒤로 공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라우.
(조사자 : 마을 앞으로 흉물스런 수로가 관통하면서 마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나요?)농수로 공사가 끝나고 그 다음해에 마을사람 아홉 명이 죽었어요. 병사로 죽고, 사고로 죽고. 그때 어른들이 한 말이 마을 생기고 한 해에 이렇게 많이 죽어가기는 처음이라고.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저 수로 때문이라고 마을사람들은 생각 했제. 농수로가 지나가면서 마을은 완존히 끝났어. 집이고, 논이고, 산이고 모든 것이 거래가 끊겼어. 마을에 불이나면 소방차가 수로 때문에, 높이가 걸려서 들어오지 못한 동네에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 마을사람들은 혹시나 불이 날까봐 전전긍긍 허고 살았제. 마을 경관이 흉물스럽게 됐는데, 누가 찾아오겠어. 마을사람들만 막심한 재산피해를 입고 살았제.
(조사자 :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는데, 관이나 행정에 민원이나 탄원서 같은 것을 제기하셨나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는 말도 못 꺼내고 살았지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담양 국회의원 김효석씨가 마을 숙원사업을 해결했지요. 김효석 국회의원을 만날 때마다 마을사람들은 간곡하게 호소했지요. 그래서 김효석씨가 마을을 직접 방문 허고 채 일 년도 안돼서 해결이 됐어요. 땅 속으로 수로관을 묻었지요. 이렇게 빨리 해결될 것을 몇 십 년이 걸렸다는 것이, 수로공사가 끝나고 나니까 허무허기도 허고, 먹다 걸린 체증이 확 내려간 것처럼 시원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조사자 : 수로관이 없어지고 마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일단 사람들이 많이 와요. 그 전에는 죽어 있는 마을이었어요. 그랴고 마을에 몇 집이 안 남았는데, 외부사람들이 집을 사가지고 많이 들어왔어요. 재산권 행사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고요. 담양사람들도 외보하면 잘 몰랐는디, 이제는 수로가 없어지고 나자, 담양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현재 이장을 맡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그랴고 환경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광주허고 제일 가깝고, 그동안 개발이 안돼서 청정한 자연조건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습니다.

고서 검단마을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
▲제보자=이주환(남)
▲줄거리=송전탑이 들어온다고 해서 마을주민들이 반대투쟁도 하고 법적 소송도 했는데 정부에서는 마을사람 주동자를 연행해 가서, 마을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정부와 합의를 보고 송전탑 건설을 승낙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우리 고서면 성월리 검단마을은 마을이 생긴 이후 지금이 가장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송전탑 때문인데요. 마을 한 가운데 딱 버티고 서 있습니다. 전두환 때 세웠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이 죽을 각오로 싸웠다고 그래요. 이춘백 면장 시절에 청와대며 국회에 민원을 내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막지를 못한 겁니다. 마을사람들이 공사를 방해한다고 현대건설에서 소송을 걸어도 마을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첨탑에 올라가 쌩쑈를 다하며 거칠게 반대를 했는데, 고등법원에서 마을이 패하고 만 거예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이 진입하여 김효중 형님을 연행한 후 유치장에 넣어버렸어요. 마을이 난리가 났지요. 어른들이 징역을 살면 되겄냐고 도장을 찍어줄 테니 당장 빼주라고 끝나버린 겁니다. 도장 찍어 주니까 2~3일 만에 공사가 끝나 불대요. 보상금 조금 받았죠. 그 돈으로 마을 논을 조금 샀는데 그건 마을에 거의 의미가 없어요.

주산은 노아의 방주, 장산은 기차역
▲제보자=채복례(여, 86세)
▲줄거리=고서면 주산리의 두 마을 중에서 주산마을은 지대가 높아 물난리를 겪지 않아서 노아의 방주로 불렸고, 장산마을은 담양 목포 간 기차 철도로 인해 기차역이 있었다.
▲이야기=어려서 물난리가 나면 주산리 산으로 도망가고 그랬어. 요만할 때 열한살 때부터 주산리 산으로 피난 갔어. 몸뚱이만 갖고 도망을 갔제. 몸뚱이만 갖고 지금은 고인이 되었는데(소를 팔던 장정팔씨가)살아 계시믄 100살이나 자셨을 거요. 그라고 비가 끝난 뒤에는 다시 내려가고 그랬죠. 아무리 수해가 나도 이 마을은 안전한 노아의 방주예요. 요 아래 있었던 보가 대경보인데, 광주댐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없애 부렀어
대경보는 증암천과 석곡천이 만나는 곳에 만들어 놨었지. 우리 마을 뒷산 이름은 서당뫼라고 부르는데 산 아래에는 배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배암실이라는 데가 있어요. 마을도 배가 떠있는 형국으로 부주형이라고 해서 배주 매산 자를 써서 주산리라고 불렀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광주에서 담양까지 다니는 기차가 있었는데, 여기에 장산역이 있었어. 어려서 부모님 따라 기차를 타봤지. 없어진지 오래됐어. 1943년에 철로를 뜯어가 버렸어.
(김덕 : 내가 28살에 여기 올 때는 기차역이 없었어)
(최차순 : 시집와서 기차가 다니는 것을 봤지. 이런 노래도 있었어)
“기차 막차 간디는 철둑 다리만 울고요. 내와 다시 떠난 뒤는 장모님 딸이 운다요”
이 마을은 전기도 빨리 들어왔어요. 봉산면은 그 뒤로 한 참 뒤에 들어왔어.

배를 만들었던 고서 주평마을
▲제보자=박문수(남, 1947년생)
▲줄거리=고서면 주산리 주평마을은 예전에 담양에 큰 강이나 뱃길이 있었으며, 배를 만들었던 곳으로 전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지금도 갈오개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 주평마을은 정조 4년에 전주이씨에 의해 개척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모갈리 혹은 주진촌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주평마을은 원래 두 군대로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일제 강정기 때 도로를 내면서 세 군데로 나뉘었어요. 주평 너머에 지금은 폐교입니다만 일신 초등학교가 있는데 그곳을 노안동이라고 합니다. 주산리나 장산리보다 오래된 마을이라고 합니다.
갈오개라는 명칭은 460년 전 이야기입니다. 담양이 그 당시에는 강바닥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김덕령 장군의 처가가 봉산이에요. 충효동에서 걸어서 잣정(분향 1리 잣정마을)을 거쳐서 해평리를 지나 교촌리까지 걸어가서 보촌에서 배를 타고 건너서 처가인 봉산으로 갔다고 그래요. 그 당시 배를 댄 곳이 보촌을 건너면 배진바우가 있는데 거기다가 배를 댔다고 그래요. 이 말은 그 사이가 물이 많으니까 배를 타고 건넜다는 말 아닙니까?
제가 본 일인데 40년 전에 그곳을 사람이 파니까 거기서 뱃장(배조각)이 나오더라구요. 뱃장이 배 몸통 배 조각이에요. 그리고 바닷가의 조개류가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배가 왕래하던 곳이다. 아까 배진바우도 ‘배를 짓다’라는 뜻이에요. ‘배를 만들다’라는 뜻이죠. 우리 마을 주평리에서 걸어서 원강리를 거쳐 쌍교로 갑니다. 쌍교에 송강정이 있어요. 송강정 밑에서 배를 타고 저 건너 봉산 연동 처갓집으로 갔어요. 거기에 김덕령 장군의 동서집도 있어요. 육로로 안가고 배를 타고 갔다는 것 아닙니까?
주평마을은 갈오개 또는 모갈리라고 했는데 갈자가 칡 갈(葛)자입니다. 인조반정 당시에 허익복 장군이 돌아가신 후로 우리 마을에 허익복 장군의 사우(제작)를 하나 지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허익복 사우를 짓기 전에 배를 타고 건너 다닐 때 우리 동네를 주진촌이라고 불렀다는 문헌이 있어요. 주진촌이라는 말은 ‘배 주자를 써서 배를 지었던 곳이다.’라는 뜻인데 요즘 말로 조선소가 있지 않았는가 싶어요.
주평리는 근세 이름이에요. 마을에 석곡천, 증암천에 흐르는 물이 다 나간 후 일제강점기 전에 주평리로 불렀다가 일제강정기에 들어와서 주산리로 바꿨어요. 일설에 모과나무가 많아서 모갈리 라고 했다는 살이 있는데 그것은 모갈 지명을 한자로 보면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띠모(茅) 칡갈(葛)자를 쓰기 때문에 모과나무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지금 노안동은 허익복 사우를 지면서 갈오개에서 노안동으로 바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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