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심(土心)과 더불어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1968년 스물여덟살때 토마토 농사 ‘농부의 길’
대나무 비닐하우스로 오이재배하다 딸기에 매력
대전까지 가서 딸기 신기술 배워 마을에 전파
2010년 90여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가 벼농사를 짓고 철 따라 고추, 마늘 같은 것을 기르며 평범한 촌 농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8년 동안은 봉산농협 조합장 일을 하느라 농사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6월 조합장에 세 번째 도전했다가 낙선하고 나서 농사꾼으로 돌아왔습니다. 낙선하고 나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빈말이 아니라 토심(土心)과 더불어 사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보람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씨는 조실부모를 했다. 일곱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구씨와 동생은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형제는 큰 숙부, 작은 숙부 집에서 떨어져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구씨는 공부를 꽤 잘하는 편에 속했다. 2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학급 반장을 했다. 6학년 때는 농사일 때문에 결석을 자주 했기 때문에 반장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졸업할 때는 ‘도지사상’을 받았다. 구 씨는 초등학교 졸업후 광주 어느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자원해서 이른 나이에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나서 고향 와우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1966년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후 구씨는 예비군훈련과정에서 ‘국민독본’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 책 속에는 토마토 재배법 같은 새로운 농사지식도 들어 있었다. 1968년 토마토 농사를 시작했다. 그 당시 무정면 용주리에서는 이미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재배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대로 첫해 토마토 농사는 풍작이었다. 광주 서방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런데 당시는 비포장 길이었기 때문에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토마토가 부딪쳐 깨졌다. 그래서 모래 운반차 위에 얹어 운송을 했다. 그런데 서방시장 상인들이 값을 터무니없이 후려쳤다. 소비자들과 직거래를 하기로 했다. 토마토와 보리를 물물교환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먹어보지 않은 것이라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토마토를 잘라 사카린을 버무려 시식을 시켰다. 반응이 좋았다. 나중에는 수북면 황금리 같은 데서 토마토를 사기 위해 와우리를 찾아오게 되었다. 와우리 몇몇 농가에서도 토마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토마토 농사로 재미를 봤다. 그렇게 3년 토마토 농사를 하다가 노지재배가 아닌 시설재배 즉 비닐하우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작목도 오이로 바꾸었다.
1971년 대나무로 터널을 만들고, 광폭 비닐이 안 나오던 때라 인두로 지져 넓게 만들어 15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토마토보다 소득이 높았다. 그런데 광주를 오가면서 지금의 망월묘역 입구 마을에서 여러 동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벌교 사람들이 광주 근교에 와서 오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후 가깝게 되자 그 사람들과 협의를 해서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재배기술, 유통 같은 것을 가르쳐 주고 우리는 토지를 제공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71년 8월에 ‘성농회(成農會)’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와우리 11농가를 비롯해 고서, 담양읍, 광주, 벌교 등지에서 2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이 때 성농회에 참여한 와우리의 농민들은 오이재배를 전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구 씨가 벌교 사람들에게 재배법을 배워 와우리 농민들에게 가르쳤다. 오이의 시설재배도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6년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토마토로 작목을 바꿨다.
“토마토로 작목을 바꾸면서 성농회는 자연적으로 해체되고 ‘신농회(新農會)’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와우리 농가 30여 호가 참여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딸기를 알게 된 겁니다. 1979년에 와우리 몇몇 농가가 봉산면 대추리에서 딸기 모종을 가져다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추리 농가에서는 1977년부터 딸기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추리 딸기재배 농가를 찾아가 봤습니다. 그런데 대추리와 차별을 두고 재배하면 더 높은 소득을 올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구 씨는 곧바로 당시 충청남도 대전시에 살고 있는 선병문씨를 찾아갔다. 선 씨는 일본서적을 번역해 앞서가는 토마토 재배법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이었다. 한국딸기의 선구자였다. 구 씨는 와우리 농민 다섯명과 함께 대전에 가서 여관에 투숙하면서 선 씨로부터 딸기재배법을 공부했다.
1980년 봉산 와우리 딸기 농사가 시작되었다. 첫해 생산된 딸기는 전량 서울 용산시장의 풍남상회에 출하했다.
“특별 주문한 상자 바닥에 분홍색 모조지를 깔고 딸기를 담아서 ‘와우 딸기’라는 상표를 붙이고, 중량, 생산자 이름을 표기했습니다. 농사는 농사꾼이 짓지만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지어야 합니다. 철저한 상업농사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80년대초 하루 평균 2~3천 상자가 올라갔는데 차에서 미처 내리기도 전에 동이 났다. 이 무렵 딸기재배 농가는 마을 전체 120여 가구 가운데서 83가구가 참여했다. 와우리 농가뿐만 아니라 봉산면 신평, 양지, 삼지 등에서도 대대적으로 딸기농사를 했고, 광주의 신기, 학림, 용강 등의 농가도 딸기농사를 했다. 그런데 이 모든 농가를 구 씨가 관리했고 출하될 때 상표는 ‘와우 딸기’였다.
“우리 와우리 딸기의 자랑이라면 전국 최초로 무농약 딸기를 생산했다는 겁니다. 개화시기에 원활한 수정을 위해 꿀벌을 투입했습니다. 그래야 딸기의 빛깔이나 모양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꿀벌이 죽어버리므로 농약을 할 수 없습니다. 무농약 딸기라는 것이 방송에 나간 뒤 와우리에 수 많은 관광버스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와우리 딸기는 무농약 딸기 외에도 전국 최초로 스티로폼 상자를 사용해 또 한 번 히트를 치기도 했다. 본래의 상자는 나무재질 이었는데 상자가 물기를 많이 머금었을 때는 딸기가 적게 담기게 되어 소비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해 1985년부터 스티로폼 상자에 담아 출하를 했던 것이다.
구 씨는 1971년부터 맡아오던 회장직을 1984년에 그만 두었다. 봉산딸기의 산 증인 구 씨는 이제 딸기농사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봉산 와우리 딸기는 대한민국 으뜸 명품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와우리 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효자 작물이 되었다. 2010년에는 90여 농가에서 50억원의 소득을 올렸다.
와우리 사람들은 3~40대 청장년층을 ‘딸기둥이’라고 부른다. 딸기농사를 지어 키우고 가르친 세대들인 것이다.
“우리 와우리의 딸기둥이들은 그냥 딸기둥이들이 아닙니다. 대학을 나왔지만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을에는 농업 2세들이 현재 열 명 정도인데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농촌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대를 졸업한 구 씨의 큰아들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