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을 잇는 일이 돈을 모으는 일보다 중합니다”
장남은 무형문화재 전수자, 차남은 기능전승 계승자
중학생 손자도 휴일마다 낙죽기술을 배우고 익혀
내 손을 보면 순간 섬뜩할 정도로 흉합니다.
中指
낙죽(烙竹)은 인두를 불에 달궈 대나무 표면을 태워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기법을 말한다. 달궈진 인두로 종이로 만든 장신구에 그림이나 글씨를 그리기도 한다. 이것을 낙화(烙畵)라고 한다.
낙죽 기법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순조 임금때 박창규가 이를 전파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죽세공예의 고장으로 알려진 우리 담양에서는 이동연, 국양문 씨가 명맥을 이어왔는데, 그들이 타계하고 나서 조운창씨가 명맥을 이어받았다.
발명왕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靈感)과 99%의 땀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많은 땀을 쏟는다고 해도 누구나 천재가 될 수는 없다. 1%의 천재성이라도 갖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44호 낙죽장(烙竹匠) 조운창씨는 쉬운 말로 ‘깎고 새기는 데’는 타고난 재주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조 씨의 살아온 세월을 들여다보면 그가 대단한 노력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내고 마는 끈질긴 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참으로 여러가지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술을 익히기 위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공부한 적이 없다. 그야말로 어깨 너머로 보고 독학(獨學)으로 전문가가 되었다. 이발사, 전파(電波) 기술자, 도장(圖章) 파는 기술, 낙죽 기법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을 그런 식으로 배워서 일상생활에 써 먹었던 것이다.
조씨가 이발 기술을 배웠던 당시 세태는 이랬었다. 이발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발소 주인, 다시 말해서 기술자 밑에서 몇 년이고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다. 시쳇말로 ‘시다바리’ 생활을 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조씨는 애초부터 시다바리 생활을 하지 않았다. 모든 기술을 그런 식으로 익혔다. 전파(電波) 관련 서적을 구입해 독학으로 전파기술자가 되어 가게를 운영한 적도 있다. 어깨너머로 도장 파는 기술을 익혀 광주롯데백화점 지하도에서 도장 파는 노점상도 했다.
이발 기술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이발사가 이발하는 모습을 딱 한 번 눈여겨 본 다음 곧바로 이발도구를 샀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마을 노인네들을 상대로 이발봉사를 했다. 마을 노인네들이 그의 이발실습 대상이 된 셈이다.
“일 년 후 고향마을(금성면 금성리 평신기)에 이발소를 차렸습니다. 이때 색다른 취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색다른 취미 때문에 그는 입건되어 감옥살이도 했다. 그리고 그런 곤욕을 치른 다음 대나무 공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늘날 무형문화재 낙죽장(烙竹匠) 조운창이 된 것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고 했다.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살다 보면 한때의 이익이 장래에 손해가 되기도 하고, 한때의 화가 장래에 이익과 복을 가져오는 수도 있다.
“그때 이발소를 하면서 취미로 목근각(木根刻)을 했는데, 그게 자연훼손죄가 된 것입니다. 형기를 마치고 군수님을 찾아가 죄송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군수님이 조운창 당신은 손재주가 있으니까 대나무 공예 쪽으로 눈을 돌리라고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일주일 후 군청공무원이 저에게 용달차 가득 대나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걸로 무엇을 만들까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담당공무원이 읍내 대나무 공예품 가게를 한번 둘러보라고 했습니다.”
조씨는 일단 읍내 가게를 둘러보고 난 다음 흉내를 낸 물건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틈나는 대로 낙죽장 이동연, 국양문 씨도 찾아가 어깨너머로 낙죽 기술도 익힌다.
“이동연, 국양문 두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낙죽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인두 다루는 기술만 터득한다고 해서 낙죽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붓글씨도 잘 써야 진짜 낙죽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 년 동안 광주 서예학원에 다니면서 붓글씨 공부를 했습니다.”
1982년, 제1회 죽제품 경진대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로, 그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 대회 대나무 공예품을 출품해 상을 받는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전국 각처의 공예품 경진대회도 참가한다. 그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외국여행도 여러 차례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관광지 구경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관광지 기념품 가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이 만든 색다른 물건들을 머릿속에 담고, 담지 못할 것을 비디오로 촬영을 했습니다.”
그는 여성용 머리핀, 대나무호루라기, 대나무 휴대폰 줄, 대나무 차숟가락 등 특허도 갖고 있다.
마침내 그는 장인(匠人)의 반열(班列)에 들어선다.
2006년에는 노동부 ‘낙죽 기능 전승자’로 선정되고, 2009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44호 낙죽장’으로 인정을 받는다.
“기능 전승자가 되고 무형문화재가 되니까 내가 만든 물건의 값이 월등하게 비싸졌습니다. 그런데 값이 비싸진 만큼 작품에 대한 책임감도 무거워졌습니다. 이제는 함부로 내놓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낙죽 공예는 돈이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 일을 가업으로 이어 나가야 합니다. 돈을 많이 모으면 좋겠지만 대대로 가업을 잇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장남은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차남은 기능 전승 계승자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생인 손자도 휴일이면 조 씨를 찾아와 낙죽기술을 배우고 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했을 때 무형문재 낙죽장 조운창 씨는 자기의 왼손을 보여주었다. 보는 순간 섬뜩할 정도로 손 모양이 흉하다. 가운뎃 손가락(中指)만 멀쩡하고 나머지 손가락은 끝마디가 잘려나가고 없다.
“죽공예를 하면서 사고로 연장에 잘렸습니다. 이 흉한 손이 내 삶의 훈장입니다.”
운 좋게 무형문화재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음을 그의 흉한 손이 말해 주고 있다.
/설재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