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감성무(感性舞)’ 만들어 낸 춤꾼 국근섭 씨
“감성무를 통해 나를 잊기도 하고 찾기도 합니다” 예술인협회 활동하며 전통문화에 관심 소리공부 차(茶)에도 푹 빠져 읍 강쟁리 민가에 찻집 열어 소리와 차 어우러진 하룻밤 풍류 ‘명가혜’ 입소문
담양읍 삼다리에는 늘 두건(頭巾) 차림을 하고 살아가는 국근섭씨와 문화관광 해설사인 그의 아내 김정숙씨가 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 제각각이다. 정상에서 약간 벗어난 사람이다. 끼가 넘치는 사람이다. 조울증세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저런 평가가 따르지만 이제는 그는 감성무를 추는 춤꾼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국씨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행정구역 이름으로 삼다리로 불리고 있는데 필자의 아득한 기억 속에는 ‘차정리’로 남아 있다. 오래된 문헌(文獻)에 우리 나라 녹차 생산의 세 번째 드는 곳이었다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 주산지가 바로 가산리, 즉 삼다리(三茶里)였다는 것이다. 지명에 ‘차 다(茶)’가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이름 ‘차정리’도 ‘차전리(茶田里)’가 와전된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국근섭씨는 10년 동안 책방을 운영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장사가 여의치 않아 그 일을 그만 두었다. 그 무렵 담양예술인협회가 발족되고 그는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예술인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담양의 명창 박동실 선생의 문하생인 박채옥 선생에게서 소리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이런 생활을 하면서 그는 차(茶)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금방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담양읍 강쟁리 민가에서 찻집을 열었다. 그리고 5년 전 차전리, 즉 삼다리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명가혜(茗可蹊)’라는 당호(堂號)를 붙인 한옥팬션을 지었다. 당호에는 흔하게 사용하지 않은 글자들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명(茗)자는 ‘차싹 명(茗)’이다. 그가 얼마만큼 차에 심취해 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름이 좀 색다르듯 이 한옥팬션 명가혜(茗可蹊)에서 벌어지는 일도 색다르다.
명가혜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 가지에 놀랐다며 이 집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첫째는 기대와는 달리 너무도 소박한 겉모습에 놀라고, 둘째는 방문을 열고 들어 섰을 때 생각지도 않은 방안 모습에 놀라고, 셋째는 소리와 차가 어우러지는 하룻밤 풍류에 놀란다고 한다. 건물의 겉모습만 보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룻밤 묵어간 사람들은 다시 찾는다고 한다. 이제는 입소문이 퍼져 외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다.
감성무는 전국적으로 조용한 반향(反響)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조촐한 음악회에 참석하여 노래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관중이 그게 무슨 춤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춤이 아니라 내 내면 속에서 저절로 솟구치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답했습니다. 감성무는 특별한 춤사위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추는 춤입니다.”
그후 그는 혼자 있는 시간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기만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의 감성무는 입소문이 나고 여기저기서 공연요청도 들어 왔다.
2007년, 가로수사랑 한여름 밤의 콘서트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그는 전국 각처를 다니며 공연을 했다. 공연 뿐만이 아니라 초청강연 요청도 많아져 시쳇말로 그는 아주 ‘바쁘신 몸’이 되었다. 감성무의 테마도 다양하다. 대나무춤, 차꽃춤, 촛불춤 등 그는 공연 때마다 주제에 걸맞는 춤사위를 만들어 낸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춤사위 중에서 ‘국제 한일 공동 캔들라이트 하지 축제(남산 서울타워, 2009.6.20)’에서 춘 촛불춤을 기억에 담고 있다. 캔들라이트축제는 촛불축제다. 24절기 중 하지(夏至)에 열리므로 하지축제라고 한다. 이 축제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열리는데 카운트다운이 완료되면 남산 서울타워, 서울시청, 일본 도쿄타워의 전깃불을 일시에 끄고 촛불을 밝힌다.
“이 축제는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느리게 살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전깃불은 물질문명이고 촛불은 친환경물질입니다. 그리고 전깃불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을 태우는 일입니다. 태워서 훼손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 취지가 너무 좋아 서울타워의 전깃불이 꺼지고 촛불이 켜지는 그 순간 감정에 복받쳐 감성무를 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감성무를 인정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엄청난 고민을 했습니다.”
국씨의 감성무가 아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초창기의 일이다. 그 무렵 그는 광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나자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고 뒷풀이가 이어졌다.“그 자리에 광주 무용계의 유명인사 한 분이 동석을 했는데 대뜸 그것도 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춤이냐는 물음이 제 화두(話頭)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춤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을 했다. 그 고민은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새벽녘이 되자 내면에서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솟구치면서 뭔가 모를 희열까지 느꼈습니다.
“그 동안 춤을 출 때 나는 무아지경이 되었고, 행복했고, 춤에 몰입했었습니다. 이른바 누구누구 류(流)라는 춤사위를 흉내내지 않고 나만의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춤을 추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엉터리 막춤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진정한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나는 춤꾼이다. 내 스스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겁니다.”
늦깎이로 절세의 가객(歌客)으로 우뚝 선 장사익씨는 국씨가 감성무를 계속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사람중 한 사람이다.
“제가 감성무를 계속 출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분은 장사익 선생입니다. 장사익 선생은 원래 세차장을 운영했는데 뒤늦게 명가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감성무를 계속할 것인가 그만 둘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 분을 만났습니다. 나이로 봐서도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는 쉰 살에 데뷔를 했다면서 결코 늦지 않았다며 목숨 걸고 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흔히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장사익 선생을 만나고 나서 감성무에 목숨을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먹어서인지 어렴풋이 길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는 여러 해째 주말이면 어김없이 담양의 명소 ‘죽녹원’에서 감성무 공연을 한다. 감성무를 출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다고 한다. 감성무를 추면서 무아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제 받기도 한다고 한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