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향 생오지에 창작의 둥지 튼 소설가 문순태씨
“소설은 핍박받는 사람들 구원의 밧줄입니다” 오랜 세월 먼 길 돌아 헐벗은 마음 여미고 고향 남면 생오지에 들어와 창작의 둥지 징소리, 철쭉제, 피아골 등 장편소설 수십권 젊은 시절 관심사는 민중과
오랜 세월 먼 길 돌고 돌아 / 헐벗은 마음 여미고 나 여기 왔다 / 열두 살에 유둔재 넘었으니 / 몇 해 만인가 이제야 귀천의 길 찾았구나 / 무등산 새끼발가락 언저리 / 깊고 푸른 품에 꼭 안겼으니 / 고단한 나 살만한 곳 아닌가 / 나무들과 함께 깨어나고 / 풀 잎 속에 은둔하듯 누워서 /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다가 / 흔들리다가 잠들고 싶은 곳 / 이제 여기서 강물 타오를 때까지 <문순태의 시 ‘생오지에 와서’ 전문>
이제 소설가 문순태씨는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담양군 남면 고향으로 돌아왔다. 열두살에 고향을 떠난 뒤 55년만의 일이다.
문씨는 언론인이었다. 대학 교수였다. 그리고 소설가였다. 그런데 언론인이든, 대학 교수든, 소설가이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모든 걸 다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 생각들이 소설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고향의 한의 미학’이라고 한다.
소설가 문순태씨에게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라는 수식이 굳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없다. 그는 문순태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굳이 나무에 비유하자면 낙락장송(落落長松)인 것이다.
문씨의 고향은 담양군 남면 구산리인데, 현재 그가 기거하고 있는 곳은 남면 만월리이다. 구산리와 만월리는 인근하고 있는 마을인데, 예전에는 근동을 아울러 ‘쌩오지’라고 했다.
오지(奧地)는 바닷가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의 땅을 말한다.
‘쌩오지’를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해 보자면 ‘숭악한 꼴짝’이 될 것이다. 문씨의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그런데 문씨의 아버지 문정룡씨는 종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자 광주로 나온 문씨는 학강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리고 소년 문순태는 일찍이 문학에 자질을 보인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광주고등학교(광고) 재학시절이다. 광고에 다닐 때 그는 선배 박봉우, 친구 이성부와 함께 광주 양림동에 살고 있던 다형 김현승 시인 집을 찾아다니며 시 공부를 한다. 후에 박봉우, 이성부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문씨는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필명으로 시를 응모해 당선되고, 농촌중보(전남매일 전신) 신춘문예에 단편 ‘소나기’가 당선된다.
소설가 문순태씨는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 문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도 시인 김현승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전남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김현승 시인이 숭실대로 옮기자 스승을 따라 숭실대 기독철학과 편입할 정도였다.
소설가 문순태씨가 비로소 시인으로 한국문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대학 4학년이던 1965년이다.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을 발표한다.
문씨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지방 신문사 기자가 되어 언론인으로서 바쁜 시간을 보낸다.
이 무렵 그는 잠시 동안 문학에 소홀한 일면을 보인다.
“겉으로 보면 문학을 잊고 사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는 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습니다. 1972년 독일 ‘괴테 인스터튜트’에서 독일어 공부를 했습니다. 이때 독일 작가들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고, 신문기자에 대한 매력도 시들해졌습니다. 그래서 귀국 후 소설습작에 매달려 밤을 하얗게 새기가 일쑤였습니다.”
1974년, 그는 월간문예지 ‘한국문학’ 신인상에 단편 ‘백제의 미소’가 당선된다. 그리고 소설가 송기숙, 한승원, 이명한 등과 함께 ‘소설문학’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76년 첫 창작집 ‘고향으로 가는 바람’(창작과 비평사)을 펴낸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첫 창작집을 냈으니 소설가로선 늦깎이인 셈이다. 그렇지만 소설쓰기 35년 동안 그는 9권의 창작집을 펴냈고, ‘걸어서 하늘까지’ ‘달궁’ ‘피아골’ 등 22권의 장편 소설, 그리고 여러 권의 동화와 산문집을 펴냈다.
그런데 생오지에 들어와 창작의 둥지를 튼 문씨의 작품세계가 약간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 관심사는 민중과 한(恨)이었습니다. 초창기에 쓴 제 소설 주인공들은 근대화, 산업화 등으로 인해 고향에서 쫓겨나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80년 5·18을 겪고, 신군부에 의해 언론사가 강제로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신문사에서 쫓겨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던 시절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소설들이 ‘징소리’와 ‘철쭉제’입니다.”
문씨 스스로도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징소리’와 ‘철쭉제’는 현재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소설이다.
생오지에 돌아온 소설가 문순태씨는 그렇게 물끄러미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썼다. 그렇게 쓴 소설들을 2000년 두 권의 창작집으로 묶어 펴냈다. 그 창작집이 ’된장‘과 ’울타리‘이다.
“된장은 쓰고, 달고, 맵고, 신 맛을 조절하는 균형적 역할을 합니다. 버터와 된장을 섞어놓으면 나중에는 버터 맛은 없어지고 된장 맛만 남게 됩니다. 된장을 보면서 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부조화 속의 조화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머지않아 열번째 창작집 ‘생오지 뜸부기’가 나오게 된다. 뜸부기는 멸종 위기에 처한 천연기념물이다. 문득 소설가 문순태씨가 멸종 위기에 처한 뜸부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소설가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저의 유년시절은 무척이나 궁핍했습니다. 유년시절의 그런 기억 때문인지 늘 제 스스로를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다보니까 그런 중압감을 어느정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은 내 삶의 구원의 밧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구도(求道)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길 찾기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삶의 길을 확실하게 찾아낸 사람이 있겠습니까? 열심히 찾다가 끝내는 미완으로 남는 게 인생 아닐까요?”